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ɴᴀᴛɪᴏɴᴀʟ ɢᴀʟʟᴇʀʏ

[보티첼리]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탄생 (1500)

by 힐데가르트 2022. 6. 27.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탄생
The Mystical Nativity (1500)

 

 

캔버스 유채
108.6 x 75 cm

 

 

 

이 그림은 우의적인 형상, 난해한 기법과 상징성에 대해 비평가들이 끊임없이 논쟁을 해왔다. 보티첼리는 수난을 겪는 예수의 특징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자세하게 표현하는 데에 그의 장년기를 쏟아 부었다. 요한묵시록에서 영감을 받은 색채의 조화, 위쪽 테두리 어두운 부분의 그리스풍 특징의 비문에는 두려움과 경배의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치밀한 문화적 암시 덕분에 이 작품의 제작 연도 (1500년)를 밝혀낼 수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종교개혁가이다. 보티첼리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2년 전에 화형을 당했는데,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아래쪽에 보이는 세 천사가 세 사람을 감싸안고, 악마들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두막 지붕 위의 세 천사는 각각 흰색, 붉은색, 녹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신학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림의 가장 위쪽에 원을 그리며 나열된 천사들은 왕관과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그리스도를 찬미한다.

보티첼리는 어긋난 원근법과 다른 인물들과 비교하여 두드러지는 성 모자의 모습을 통해 중세의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화풍과 사실주의의 결핍을 강조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화풍은 이 작품 이후에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보티첼리는 이 독특한 작품에 직접 자신의 서명과 제작연도를 적어넣었다. 이 그림은 면면에 정치적, 종교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오두막 주위의 금빛 광채 안에서 큰 원을 그리고 있는 천사들이 손에 들고 있는 올리브 가지는 평화를 의미한다. (다니엘라 타라브라)

이 그림은 제목의 ‘신비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특히 보티첼리는 그림 상단의 명문에서 예수 탄생을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종말론과 예수 재림에 관한 요한 묵시록과 연관시켜 그렸음을 그리스어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요한이 환상을 보고 묵시록을 쓴 바로 그 마음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묘사한 것으로, 탄생의 순간을 빌려 아기 예수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 역경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포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새 예루살렘과 예수 재림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의 주된 테마는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허술한 집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이 보인다. 성가족이 집을 비롯한 주위에 비해 더욱 크게 표현된 것이 어색하지만, 이런 과장성은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그림에 한층 신비감이 감돌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가만히 살펴보면 뭔가 상서롭지 못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먼저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말안장에 기댄 채 놓여있다. 이 말안장은 십자가 처형 전에 나귀를 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그래서인지 그 나귀의 등에 예수의 죽음과 연관된 십자가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아기 예수를 싸고 있는 흰색의 천이마치 수의처럼 보이며,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마구간이 아닌 동굴로 그린 것 역시 예수가 훗날 묻히게 될 무덤을 연상시킨다.

특히 그림 하단, 신비한 탄생의 현장에 다다르는 길이 지그재그로 난 것이 예수께서 겪어야 할 고난과 수난을 의미하는 동시에, 신앙의 길에 놓인 고된 난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권용준)

 

 

보티첼리와 사보나롤라
 

사보나롤라는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과격했다. 샤를의 군대는 그가 예언한 "천사의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교황은 프랑스 군을 몰아내는데 힘을 보태지 않았다. 그는 사보나롤라에게 설교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응하지 않자 1497년 6월 파문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토스카나 지방에 흉년이 들어 프랑스는 약속을 어기고 피사를 피렌체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프란테스코 다 풀리아가 도미니코회를 향해 "불의 심판"을 제안했다. 사보나롤라의 계시에 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의식으로 양 교단을 대표하는 수사 한 명씩 불길을 통과하되, 불에 타 죽는 측의 교단을 추방하기로 합의했다. 사보나롤라가 믿었던 샤를 8세가 죽은지 이틀 후인 1498년 4월 7일 시뇨리아 광장에 길이 30m의 불의 복도가 세워졌다.

그러나 막상 이 불의 길이 현실이 되자, 양 교단은 모두 망설였고, 마침. 쏟아지는 비로 인해 심판을 중단되었다. 모든 비난이 사보나롤라로 향했다. 그간 그의 가짜 예언에 속았다고 느꼈다. 성난 군중과 시뇨리아(시의회)는 그를 탑에 감금했다. 결국 두 제자와 함께 이단죄와 종파분립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시뇨리아 광장 "허영심의 소각"이 열렸던 같은 지점에서 5월 23일 공중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다. 그가 피렌체를 통치한 지 4년만에 찾아온 참극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오! 주여"를 부르짖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 베카오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 버려졌다.

그의 사후 보티첼리는 당시의 충격으로 15세기 말 다가오는 종말을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증언한 <신비의 강탄> 이외의 거의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한다. 말년이 되자 붓을 놓고 싶은 시름에 빠졌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와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보티첼리는 자신의 미술 양식을 다시 살펴보았다. 1504년경 <비르기니아와 루크레티아 이야기>라는 두 점의 패널화를 그렸는데. 모두 지도자의 폭정 때문에 발생한 로마 시민과 군인의 반란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도 읽기 전에 작가의 사상과 배경을 먼저 보고 읽으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추종했던 인물과 그의 삶의 자취와 배경 그리고 사상을 잠시라도 살펴보면, 그가 작품속에서 말하고 하는 것들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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