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도나 이사벨 데 포르첼
Doña Isabel Cabos de Porcel
(1805)
보통 고야의 작품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옷을 입은 마하》 또는 《옷을 벗은 마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그림도 다수 그립니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과 판화집 《전쟁의 재난》이 대표작입니다.
회화 작가들은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그림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고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왕가의 신임을 잃기도 합니다. 그는 왕궁을 나와 외딴 집에서 검은 그림 연작을 남기게 됩니다.
이성이라는 이름 뒤의 광기를 묘사한 그림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순간 섬뜩하고 기괴한 터치와 형상 그리고 짙은 색감은 마치 지옥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가지고 온 그림은 초상화입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여성은 아름답습니다. 1700년대 후반, 1800년대 초반의 유럽 여성의 권력이 높다고 여겨지지 않음에도 그녀의 눈동자엔 여유가 있고 태도는 위엄이 넘칩니다.
캔버스 유채
82 x 54.6 cm
고야는 1805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학회에 전하였다. 여인의 신원은 그림의 뒷면에 잘 표기되어 있다. 고야는 후에 화재로 잃게 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림 속 여인의 남편인 돈 안토니오의 초상 역시 제작하였다.
금발의 위엄있는 이 여인은 옅은 핑크와 탠 컬러의 긴팔 드레스 위에 화려한 검정 레이스 만티야를 입고 있다.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까지 스페인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던 옷을 걸치고 기품있고 당당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의 성품이나 평소 그녀의 태도가 그림에서도 표현된 듯 하다.
그녀의 자세는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듯 하다. 왼손을 허리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안쪽에 단아하게 올려져 있다. 붉은 상의 위에 걸친 견사로 된 검정 레이스 베일은 시선을 정방형으로 분산시킨다. 우아한 모양의 베일은 빗으로 머리카락 안으로 고정되어, 환한 빛이 서서히 번지는 투명한 안색과 조화를 이룬다.
이 여인의 우아한 모습은 "영원한 여성성"이라 불리며 로맨틱한 감성이 유행하던 당시의 표현기법과 잘 맞아 떨어진다.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고야의 작품들은 그가 존경하던 인물들 ─ 타치아노와 벨라스케스 ─ 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고야는 가볍고 민첩한 붓놀림으로 다채로운 검은색이 조화된 투명한 레이스를 묘사하였는데, 그 덕분에 이 레이스는 그림의 주인공으로 불릴만 하다. 검은 레이스는 이 그림에서 단연 독보적인 시선을 잡아끈다. 이러한 검은색조는 이후 마네를 매혹하게 만든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호세 베니토 데 고야 이 프랑크는 도금 업자였으며 처가에 살았다. 때문에 고야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 집안에서 보냈다. 1749년 무렵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에 집을 마련하였고 몇 년 후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이 곳에서 고야는 마르틴 사파테르와 막역한 사이였던 에스쿠엘라스 피아스의 학교에 다녔으며 이 때의 경험은 고야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야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 14세가 되자 화가 호세 루산의 도제로 들어갔다.
1765년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 후일 고야는 마드리드로 옮겨 당대의 유명한 궁정화가인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야는 스승과의 불화로 인해 졸업을 인정받지 못했다. 고야는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미술 학회에 입회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1771년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하였고 파르마의 회화전에서 2등으로 수상하였다. 그해 말 고야는 사라고사로 돌아가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의 화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고야는 프란시스코 베이유 이 수비아스와 함께 작업하였다. 고야의 뛰어난 색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해졌다.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린 이래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789년에는 정식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연봉으로 50,000 레알과 사륜 마차 비용으로 500 두캇을 받았다.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가운데 1800년 작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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