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알렉산더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
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
캔버스 유채
236 x 475 cm
1857년 입수
이 작품은 고대의 유명한 일화를 묘사한 것으로 1570년 전후에 피사니 가문을 위하여 제작하였고, 피사니 빌라에서 1857년까지 보관하였다. 베로네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풍요로운 정신과 화려한 색채를 구현해낸 작품으로 때때로 티치아노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 받기도 했다. 이 거대한 작품은 굉장히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의 화려한 희곡적 표현의 묘미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와 그의 가족들에게 베푼 알렉산더의 유명한 자비는 화가에게 있어서 희곡 상연과도 같은 작품을 구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이자 기회였다.
배경에서는 화가의 친구였던 팔라디오가 설계한 것과 같은 방식의 아치 모양 복도가 대리석으로 이어져 있고, 가득 찬 햇살이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첫 번째 줄의 주인공들(피사니 가문의 인물들로 보이는)은 역광을 받아 배경의 매혹적인 빛과 대조를 이룬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갖가지 사물들의 단단함, 성질과 조직, 무기와 갑옷, 동물들, 그 외 이 희곡적 장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만한 재능을 펼쳐 보였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 대왕의 자비를 표현한 것이다.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젊은 알렉산드로는 갑자기 왕위를 물려 받게 된다. 20세의 나이로 그는 내정을 안정시킨 후 3만 5000 명의 군사와 전함 160 척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다. 당시 강력한 병사를 보유한 페르시아는 지중해는 물론 인도 서부까지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다.
전투에 패한 다리우스 3세는 포로가 된 그의 아내와 모친 그리고 자녀를 되찾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알렉산드로와 평화 협상을 제의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이를 승낙한다.
이 작품의 장면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는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된 다리우스 3세 가족을 알렉산드로가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 안에 알렉산드로 대왕과 그의 제군들이 갑옷을 입고 서 있으며 그들의 앞에 다리우스 3세의 아내와 모친 그리고 자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오른쪽에 마치 주인공처럼 서 있는 붉은 옷의 남자(노인 바로 앞의)는 알렉산드로의 절친 하페스티온이다. 그가 왼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드로 대왕이다.
1
알렉산드로스 대왕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절친 하페스티온이다.
그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라고 착각하고
몸을 낮춘 다리우스 3세 모친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알렉산드로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자비라는 말은 이 상황에서 나온 듯 하다.
2
하페스티온
붉은 옷을 입은 하페스티온은 그를 대왕으로 착각한
다리우스 모친에게 오해를 바로 잡아 주고 있다.
그녀를 대하는 마케도니아인의 태도를 보면
포로임에도 그들의 명예를 존중하여 예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사육 원숭이
건물 복도에서 들어오는 강한 역광을 받고 있는 원숭이는
베로네세의 특유의 테마에 영감을 주었다. 베로네세는
자연스러운 형상 안에 의미심장한 소재를 즐겨 끼워넣었다.
이 작품에서는 눈으로 확인하는 바와 같이 배경 속
깊은 곳과 앞쪽과의 대비를 강조하고 있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서 티치아노에게 큰 영향을 받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주요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 <레비 가의 향연> 등이 있다.
베로나에서 태어나 1553년 베네치아에 가서 티치아노의 작품을 익혔고, 1560년에는 로마에 가서 고대 로마의 장식화에 이끌린 그는 <카나의 결혼>(1563), <레비가(家)의 향연>(1573)과 같은 작품에 당시의 호화로운 베네치아의 연회를 묘사하였다. 그가 시대 역행적이었던 것은 정신적 내용보다도 미를 평가의 기준으로 하는 점이며, 당시의 엄격한 반종교개혁 운동의 시대에 있어서 성기 르네상스의 장중·화려한 양식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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