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ɴᴀᴛɪᴏɴᴀʟ ɢᴀʟʟᴇʀʏ

[한스 홀바인(小)] 외국 대사들 (1533)

by 해래나 2022. 9. 22.

한스 홀바인(小)
Hans Holbein the Younger


대사들
The Ambassadors

떡갈나무 목판 유채
207 x 209.5cm
1890년 입수

 



이 걸작에서 홀바인은 대단한 묘사력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이 매우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쟝 드 당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로이며 영국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다.

그러나 사실 그림 속 두 남자 중 대사는 왼편의 장 드 당트빌(Jean de Dinteville)이다. 이 그림은 1533년 주영 프랑스 대사 당트빌이 친구인 사제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의 런던 방문을 기념해서 홀바인에게 의뢰한 것이다. 홀바인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테크닉으로 두 남자와 배경을 실감나게 그려냈는데 그림 안에 여러 가지 상징들을 숨겨 두었다

이들의 옷차림에서 보이는 차이점에서 작가는 활기찬 삶과 관조적인 삶을 대비시켜 나타내려고 한 듯 보인다. 많은 관측 기구들은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선반 위의 물건에 써져 있다. 또한 날짜와 시간도 알 수 있다.

홀바인은 선반 위에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사물들의 외관도 잊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실상의 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것과도 같은 광경을, 화가는 두 젊은 프랑스인들이 그 관심을 공유했던 과학과 예술을 보여주는 배경의 사물들과 어우러져 구성하고 세련되게 완성하였다. 선반 위쪽은 아나톨리아풍의 카펫으로 덮여 있고, 시간을 측정하는 여러 기구들이 놓여 있다. 그 아래쪽에는 류트와 끊어져 앞으로 튀어나온 현, 그리고 루터를 찬양하는 내용의 책이 펼쳐져 있다.

작품이 그려진 1533년, 프랑스 대사 당트빌은 런던에서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이 해에 영국 왕 헨리 8세가 에스파냐 공주인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이혼 과정에서 헨리 8세가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 성공회’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서 본인이 그 수장 자리에 앉아 버렸다는 데 있다. 당시 유럽에서 교황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고 있던 존재라 신하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교황보다 더 무서운 전제군주 헨리 8세는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화형장의 불구덩이에 쓸어 넣고 전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프랑스인 당트빌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의 모국인 프랑스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당트빌에게 헨리 8세의 마음을 돌려 보라고 거듭 명령했지만 토머스 모어 같은 총신들마저 처형장으로 내몰리는 마당에 당트빌이 헨리 8세를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이같은 불안감이 겹쳐서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겨우 2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반처럼 늙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 친구인 조르주 드 셀브가 영국으로 왔던 것이다. 셀브는 당트빌보다 네 살 아래인 스물다섯 살이지만 좋은 집안 덕에 이미 가톨릭 주교가 되어 있었다. 요컨대 당트빌이나 셀브로는 모두 프랑스 명문가의 자제들이었다.

예리한 초상화가 홀바인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두 인물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그림의 배경에도 갖가지 사물들을 그려 넣어 이들의 가문과 지성을 한껏 과시하게끔 해 주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높은 탁자에는 천문학 관련 기구들이 잔뜩 놓여 있다. 그리고 2단으로 되어 있는 밑의 탁자에는 지구의, 류트, 수학책 등이 쌓여 있다. 이것만 보아도 당대의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 다양한 분야에서 학식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 사물들은 초상화가 그려진 시대인 16세기를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된 과학과 인간의 시대임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 같다.

 

한스 홀바인(小)
Hans Holbein the Younger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97년 ~ 1543년)은 독일의 화가이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으며,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큰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능하여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동등하게 그려진 종교적인 기풍 등으로 인해 독일 최대의 화가로 일컫는다. 작품으로는 <헨리 8세>, <모레테 상>, <에라스무스>, <죽음의 무도>, <대사들> 등이 있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화가로 동명인 부친도 당시의 중요한 화가였고 아들인 홀바인도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배웠으며, 1515년 당시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바젤에 가서 그곳에서 화가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곳에서 1526년까지 머문 후에 약 2년간을 런던에 체재하였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1526∼1528). 이 제1차 런던 체재중에 이미 초상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있던 그는 재차 런던 행차를 결의, 일단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에 갔다가 1532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안주하여 1543년에 사망하였다. 그 동안의 1536년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에 임명된 적도 있다.

홀바인은 유럽에 있어서 고금을 통하여 최대의 초상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뒤러와 크라나흐가 대표하는 독일 르네상스의 빛나는 초상화 예술의 전통을 그 정점에까지 끌어 올린 공적은 매우 크다. 모델에 대한 냉정하고 예리한 관찰과 정확하고 극명을 다한 세부 묘사, 명쾌한 화면 구성, 나아가서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대한 투철한 이해력 등을 그의 특색으로 하는 홀바인의 예술은, 가령 <로트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와 <게오르크 초상>(1532년, 베를린 다름미술관)에 그 진가를 찾아볼 수가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