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ɴᴀᴛɪᴏɴᴀʟ ɢᴀʟʟᴇʀʏ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안나와 성 요한과 함께한 성모자 (1500-1505)

by 힐데가르트 2022. 8. 25.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성 안나, 세례자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聖母子)

Mary and Jesus & John baptist as Child (1500년 경)

 

 

목탄 및 흑백 분필로 종이 위에 스케치와 스푸마토

141.5 x 104cm

1962년 입수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작품 중의 하나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이 작품은 접붙인 여덟 장의 종이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의 판 또는 벽에 작업한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라고 추정되며, 인물의 형상은 그 윤곽선이 갈라지거나 구멍난 곳 없이 완전하다.

 

이 초상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14세기 피렌체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다루던 두 가지 테마 ─ '성 모자와 성 안나' 와 '성 모자와 성 요한' ─ 이 결합하면서 탄생하였다.

 

이 작품은 매우 복합적인 구성으로 치밀한 간격으로 합쳐진 등장인물들이 피라미드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두 여인은 어머니 특유의 미소로 마치 하나의 형상인 양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형성한 형태와 명암으로 보아 작가가 주의깊게 탐구한 기색이 역력하다. 또 다른 부분 이 장면의 신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 안나가 들어 올리고 있는 팔 아래쪽 부분은 만족스럽지 못한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데, 화가가 계속해서 세심한 작업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회화 작업을 진전시킴에 있어서 인물들의 얼굴과 상반신을 수정하고 마무리하는 데에 매우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애소 사용한 피라미드 구성은 15세기 예술에서 라파엘로부터 그다지 독창성이 없는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선으로 소묘한 인물들의 형체가 퍼지면서 희미해짐과 동시에 헤오나르도 다 빈치 특유릐 경이로운 시적 효과가 감동적으로 표현되었다. 1962년 한 관람객이 작은 칼로 그림을 찢기도 하고, 1987년에는 다시 한번 광적인 관객이 총으로 작품을 손상시키기도 했다.

 

 

 

 

 

다 빈치 부터 다른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스케치의 변천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대두되었던 화제는 '인물들의 손발이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거장 다 빈치는 자신의 초안 스케치 방식에 있어서 이러한 지적을 인정했다. ─ 이것은 균형 감각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자랑하는 창조적 시기의 작가의 '발명가'로서의 성향에 새로운 자극을 유발하게 된다.

 

 

 

 

아기는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성 요한을 축복하기 위해 그쪽으로 손을 펼치고 있다. 팔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해 뻗어있다. 

 

등장인물의 포즈와 동작은 유동적이고 조화로운 운율과 더불어 상호 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풍부한 선의 스케치는 미완성의 느낌을 주면서도 강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선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뭉개진 선마저도 더 들여다 보게 하는 신비로움이 숨겨져 있는데, 이 작품이 종교화라는 점에서 더 돋보였다고 보여진다. 성모의 미소는 모자리자를 연상케 하는데,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그 누구보다 마리아에게 집중되어 있는 듯 그녀의 표정이 이 작품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했다. 네이처는 과학 전문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를 1위에 뽑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으며 2위는 세익스피어였고,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간신히 6위를 차지했다. 르네상스형 만능인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레오나르도다빈치는 르네상스 전성기에 1452년 4월 15일 사생아로 태어났다. 레오나르는 Anchiano의 유명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출생지는 Vinci에서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레오나르도의 가족은 13세기 이래로 여기서 줄곧 살아왔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났을때,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Vinci, Ser Piero는 공증인이자 지주였다.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첫번째 부인을 맞이할때 그가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생모 카타리나는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과 결혼하여 캄포제피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다빈치는 처음에 생모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아버지가 결혼 후 자식을 얻지 못하자 본가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다빈치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알려진것이 많치는 않으나 1457년 경의 과세 기록에 따르면 부친과 한집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다빈치를 양육한 이는 조부모와 다빈치의 숙부였다.

아버지 피에로가 피렌체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지역 공증인과 동업을 하게 되면서 집을 자주 비우고 피렌체로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중 계모 알비에라는 자식을 낳지 못한채 1464년에 사망했다. 1452년,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의 딸과 재혼했으나 새로운 계모 역시 아이 없이 사망했다. 이후에 아버지 피에로는 두 차례 더 재혼하였고 이때 아이를 많이 낳은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두 12명이나 되는 이복 형제가 생겼다. 그러나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1504년 아버지 피에르가 77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이복형제들은 합심해서 음모를 꾸미고 다빈치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한푼도 나눠주지 않았다. 또한 훗날 숙부 프란체스코가 사망한후에는 상속문제를 두고 이복형제들과 법적인 소송을 치루기도 하였다.

사생아의 한계
당시 피렌체에서는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심한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차별과 무시는 존재하였다. 귀족 가문의 사생아가 아닌 경우에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의사, 약사, 법률가, 행정 공무원이 될 수 없는등 직업 선택의 폭도 제한적이었다. 부친이 속한 길드(조합)에서도 서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고 비공식적으로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을뿐이며 당대 귀족이나 식자층의 자녀들처럼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고 그 당시 라틴어를 연습했던 기록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 밖의 업적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어수업》(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 공부 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본 그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지 못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물 정보는 위키백과에서 도움을 얻었으며, 그림 정보는 다니엘라 타라브라의 평론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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