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로토
Lorenzo Lotto
루크레치아
Lucrezia
캔버스 유채
96 x 110 cm
1927년 입수
초상화 속 여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루크레치아가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루크레치아는 고대 로마의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6세에게 간강당하자 남편에게 이를 알린 후, 그 자리에서 단검으로 자살한 로마의 귀부인이다. 이 이야기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시인과 화가 등이 즐겨 다루던 주제였다. 당시 루크레치아의 자살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 공화국 설립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로렌초 로토의 말장난인지, 상징적인 의미인지 실제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상징성을 통해 초상화속 부인의 이름이 루크레치아일 가능성도 있다. 로마 시대의 루크레치아를 본 받아 그녀 자신도 강단있는 믿음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빛, 탁자, 의자, 여인의 자세, 화려한 드레스, 머리 위의 터번, 아름다운 황금과 루비, 진주로 장식된 펜던트 등은 루크레치아를 부각시키는 소품들이다. 훤히 드러난 여인의 어깨와 가슴의 탄탄한 하얀 피부는 그 어떤 소품보다 여인에게 집중하게 한다.
역동적인 동작으로 묘사된 '그림 속의 그림'은 스스로를 찌른 루크레치아를 모든 여인의 모범으로 명시한다. 이 위대한 자결은 전통적으로 부인이 남편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희생이자 절대적인 헌신의 상징이었다 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이는 부부 간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루크레치아의 숨은 의도이기도 하다. 루크레치아의 이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라틴어 인용구에서 볼 수 있다. 로토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편평한 구도인데, 아마 로토는 이 작품에서 초상 화가로서의 능력을 스스로 시험해 본 듯하다.
주인공의 얼굴은 불균형적이고, 행위는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소매는 과장하여 묘사하였다. 그녀의 매우 흰 피부와 화려한 의상은 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두드러지며, 뒤편의 빛은 마치 보는 사람의 측면에 창문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그림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부자연스러운 터번 형태의 머리 장식도 손가락의 결혼반지와 마찬가지로 이 여인이 기혼 부인임을 암시한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는 여인이 결혼한 직후로 추정된다. 여인의 얼굴은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현실적이고 세심한 묘사때문에 오히려 로토의 작품 중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종이 위에는 라틴어 인용구가 쓰여져 있다. "루크레치아의 예를 본받아 부정한 여인은 누구도 살 수 없으니라" 이 인용구는 한번 명예를 잃은 여인은 누구라도 더이상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루크레치아는 자신이 그녀(로마의 루크레치아)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서양제비꽃은 정절의 상징이다.
여인의 오른손은 분명하고도 도전적인 손짓으로 그녀가 의도하는 바를 명시한다. 루크레치아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딴 고대 로마의 귀부인 루크레치아를 통해 자신의 부부간 미덕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을 보여준다. '루크레치아'는 라틴 작가 리비우스의 <로마의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로렌초 로토(Lorenzo Lotto)
인물의 성격을 날카롭게 포착한 초상화와 종교적 주제를 다룬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에 그는 트레비소에서 살았고 베네치아의 화가인 조반니 벨리니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영행을 받았지만 그의 화풍은 베니치아 전통의 주류와 항상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제작 연도가 밝혀진 그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모와 순교자 성 베드로 Madonna and St. Peter martyr>(1503)dhk <베르나르도 데 로시 주교의 초상 Portrait of Bishop Bernardo de'Rossi>(1505)은 나폴리에 있는데 주름진 옷과 풍경을 처리한 기법 및 차가운 색조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는 1508-12년 로마에 있으면서 그 무렵 바티칸 궁전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그리고 있던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초기의 딱딱한 화풍과 차가운 색조를 버리고 유연한 형태와 금빛의 밝은 색조를 채택했다. 1513년부터 그는 주로 베르가모에 머물렀고, 그의 화풍은 이곳에서 더욱 원숙해진다. 이 시기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은 산 베르나르디노 교회와 산 스피리토 교회의 제단화이다.
1526-27년 베네치아로 돌아간 그는 티치아노의 열정적인 색조와 웅장한 구도에 잠시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은 <영광에 싸인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 <베네치아 카르미니 교회> 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주로 감정과 내면 심리를 강렬하게 묘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의 수많은 초상화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특히 <수태고지>(1527년경)에서는 떨고 있는 인물들, 휘감긴 옷의 주름, 극적인 조명 효과, 원근법 생략 들에서 잘 드러난다.
로토는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일파에게 냉대를 받다가 1529년 검열을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레마르케로 이주한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은 훨씬 더 격정적이 되었고 <로사리오의 성모>(1539),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531)와 같은 수많은 작품들은 힘차고 피밀한 구도와 강렬한 색채로 강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는 모델의 성격을 가장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능력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후 1540년 베네치아로 돌아갔다가 1549년 다시 레마르케로 돌아갔으며 그의 생활은 불안정해졌다. 노년의 그는 생계를 유지하지 위해 병원에 누워있으면서도 그림을 많이 그려야만 했다. 한 쪽 눈이 먼 그는 1554년 비평가들과 빚더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로레토의 산타 까사 수도원의 노동 수사로 들어갔고 이곳에서 그의 가장 섬세한 걸작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현현 Presentation of the Christ in the Temple>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미완성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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